글쓰기/시와 수필

글#4 - 불행속 행복

두팔손 2021. 5. 26. 18:29

갑자기 행복론이라는 강의 과제했던게 생각나서 끄적끄적....!

조셉 우드 크러치(Joseph Wood Krutch)

우선 간단하게 조셉 우드 크러치에 대해서 알아보면 미국 남서부에 관한 자연 책을 쓰고 범신론 적 철학을 발전시킨 미국 작가, 비평가 및 자연 주의자였다...!

 

그의 관점에서 러셀의 비판에 대하여 반박을 하고 적절한 행복관을 제시해보자....!

 

인간은 착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사실상 없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사회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상해주지도 않으며, 착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왜 바르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는가? 바르게 살지 못하면 어떠한 양심의 가책, 나아가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러셀은 사회 통치적인 관점에서의 불행의 ‘역할’을 간과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불완전한 존재이며 죄를 지은 존재라면? 사회에 죄를 갚기 위해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으며 죄를 지은 불행한 존재이다. 하지만 현재의 바른 삶으로 죄가 사라지며, 죽음에 도달했을 때 육체를 벗어난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사회 통치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은 불행한 존재라는 점은 인간이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신이라는 존재는 이러한 주장을 강하게 설득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사회는 구성원이 사회의 규율을 어기지 않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이른바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통치적으로 유리하다.

 

러셀은 불행한 사람이 젊었을 때 정상적인 만족들을 박탈당하며 삶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게 되고, 더 나아가 완전한 좌절감을 느끼면서 쾌락의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욕구에 취약한 존재이다. 오히려 러셀이 주장하는 행복한 사람이 쾌락의 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말초 신경계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인간이 죄의식 없이 언제든 말초 신경계를 자극하는 행위들을 하게 된다면, 말초 신경에만 사로잡힌 삶을 살 것이다. 맛있는 음식, 사람들과의 성적인 만족 등 인간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행동들은 너무나 인간에게 취약하다. 말초 신경계에 잠식된 삶에는 중추 신경계가 일을 할 수 없다. 러셀이 경고한 쾌락의 신자는 거리낌 없이 욕구를 충족해도 되는 사회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올 수 있다.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말초 신경계의 욕구를 충족하는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사회에서 구성원들을 통제하고 이끄는 데에 유리하다.

 

러셀은 크러치를 허영이 깃든 비관론자, 염세주의자로 보았다. 그는 크러치가 인생의 쾌락을 다 겪은 후에 ‘인간의 삶은 불행하다.’로 결론을 낸 점을 크게 비판했다, 실제로 크러치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부류였고, 생존을 위협하는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지만 크러치의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엘리트 집단의 주장을 허영으로 치부하는 러셀의 관점이 더욱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다. 크러치의 행복론도 앞서 언급한 사회 통치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가 풍요로운 삶을 누렸을지 몰라도, 영생의 삶은 누릴 수 없었기에 더더욱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주장을 했다고 본다. 인간이 행하는 무수한 일들은 생이 끝나면 멈추게 된다. 영생을 누릴 수 없기에,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불행하고 슬프다. 여기에서 멈춘다면 정말 인간의 삶은 우울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이 이후의 사고는 의미가 있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여 불행하고 슬픈 일이지만, 유한한 삶이기에 우리가 하루를 살더라도 가치 있게 살도록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한 삶을 위로하고 죽음으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지금’의 삶을 충실하게 살려고 한다면, 크러치가 주장한 불행한 삶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불행에 있다. 가치는 늘 반대가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늘 행복함이 가득해라.’라는 말은 사실상 ‘불행해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항상 행복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 아니다. 늘 우리가 행복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일까? 아니다. 행복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불행이 있음으로서 행복이 있다. 가치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행복만을 쫓지만, 진정한 행복은 불행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영생을 바라지만, 영생을 얻는 순간 우리의 유한한 삶의 가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 충실하며 다양한 불행을 겪고, 또 이를 통해 행복의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명언으로 마지막을 장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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